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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구 달성군] 대구활공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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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활공랜드


- 홈페이지
www.대구활공랜드.com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 312

‘안전하지 않으면 비행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처럼,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대구활공랜드는 경력 20년 이상의 베테랑 파일럿과 함께 대구 달성 하늘을 날며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2인승 전문 조종사와 함께 하늘을 나는 체험 비행(Tandem Flying)은 패러글라이딩을 처음 접하는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좋다.


※ 소개 정보
- 문의및안내
053-755-1336

- 이용시간
금, 토, 일, 공휴일만 운영 (홈페이지 참고 요망)





◎ 이용요금
100,000 ~ 150,000 (영상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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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 관광 정보

⊙ 현풍 500년 느티나무 테마공원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비슬로 741 (현풍면)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창원으로 가는 중부내륙 고속도로지선 하행선 현풍 휴게소에 위치한 현풍 500년 느티나무 테마공원은 방문객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500년 느티나무를 모티브로 한 테마공원이다.
현풍 휴게소 인근 마을의 당산나무인 500년 느티나무 할아버지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방문객들이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하여 고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다.
500년 느티나무에 LED 조명을 설치하여 야간에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압길과 족욕체험이 가능하며 느티나무 옆 낙동강 전망대에서는 낙동강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다.
2013년 한국도로공사 176개 휴게소 중 올해의 테마휴게소로 선정되었고 2014년에는 국토교통부 주관 대한민국 경관대상 역사문화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 이양서원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삼강3길 23

1707년(숙종3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곽안방(郭安邦), 곽지운(郭之雲), 곽규(郭赳), 곽황(郭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중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54년에는 사당을, 1982년에는 동·서재를 건립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현풍곽씨십이정려각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동길 3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현풍곽씨십이정려각은 조선 중기 영조 때 세운 정려각이다. 선조 31년(1598년)부터 영조 때까지 곽씨 일문(郭氏一門)에 포상된 12정려(十二旌閭)를 한 곳에 모은 것으로, 건물은 앞면 1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으며, 6·25전쟁으로 건물 일부와 비석 1구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1963년에 모두 중수하였으나,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나, 12정려각은 한 마을에서 곽씨 일문에 12정려가 나온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지키면 국가에서 포상하고 정려하였다.

[중요 행적]
①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이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자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이에 선조가 정려하였다.
② 곽재우의 사촌동생인 곽재훈(郭再勳)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병환 중인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 선조가 이를 정려하였다.
③ 곽재기(郭再祺)의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강으로 투신 자살하여 선조가 정려하였다.
④ 곽홍원(郭弘垣)의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죽음으로 현종(顯宗)이 정려하였다.
⑤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결혼 후 1년도 못되어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대신 죽기를 주야로 기원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을 잃게 되자 식음을 전폐하여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의 정려 등이 있다.


⊙ 현풍포교당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27길 54-6 (현풍면)

* 도심속 포교를 목적으로 지어진, 현풍포교당 *

산 중의 큰 절이 도심의 포교를 위한 거점을 삼기 위해 도시민들의 생활터전 가까운 곳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고 보다 더 부처님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곳이 이른바 포교당이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는 포교당이라는 이름을 바꾸고 어엿한 사명을 따로 지어 ‘도심포교당’의 기능이 아닌 ‘도심사찰’로써의 제 기능을 소화해 내려는 추세이다. 그래서 작은 역할을 하던 곳이 큰 역할을 하려하다 보니 부작용도 조금씩 생기는 듯 보인다. 이는 산중사찰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기능을 하는 포교당의 작은 기능을 도외시하는 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풍포교당은 이러한‘작지만 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포교당이다. 현풍포교당은 애초 유가사의 포교당에서 출발해 현재는 동화사 포교당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08년 창건된 현풍포교당은 창건 취지에 맞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포교의 최전선에서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현풍포교당은 어떠한 특별한 기도처로 표방하지도 않고 누구나 절에 와서 자신이 소원한 바를 부처님께 기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비록 대웅전과 요사채 하나씩만 자리해 있는 작은 사찰일지라도, 현풍포교당은 앞으로도 포교당의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사명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다며 포교의 일념으로 매진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현풍포교당의 창건배경 및 역사 *

현풍포교당은 1908년 해인사의 변설호스님이 유가사와 도성암을 왕래하면서 증계지 포교당을 설립한 것이 창건의 시작이다.6.25동란 때에도 소실되지 않은 현풍면의 유일한 사찰이며 1958년 7월 15일 김해운스님이 대웅전과 요사를 중수했다. 본래 유가사의 현풍지역 포교당으로 시작됐지만 독립사찰로 분리되면서 지금처럼 동화사의 포교당이 되었다. 그러나 토지는 현재까지 유가사의 소유로 되어 있어 재정적으로는 유가사에 소속돼 있다. 2001년 법당의 노후로 인해 대웅전을 새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현풍석빙고(상리석빙고)


- 홈페이지
대구 달성군 문화관광 https://www.dalseong.daegu.kr/culture/index.do
문화재청 http://www.cha.go.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1길 36

달성군 현풍면사무소에서 약 300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현풍석빙고는 '상리석빙고'라고도 불린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1982년 보수공사 때 '崇禎紀元後二庚戌十一月(숭정기원후2경술11월)'이라고 쓰인 건성비가 발견되어 1730년(영조 6)에 만들어졌다고 보여진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1738년에 만들어진 경주 석빙고와 안동 석빙고(1737∼1740), 창녕 석빙고(1742) 보다 축조연대가 앞선다.석빙고 입구는 바로 산이고 앞쪽에는 '치마거랑'이란 이름의 시내가 흐르는데 그 옛날, 계곡의 물이 얼게 되면 계곡의 얼음을 떠다가 이곳에 보관했다고 한다. 빙실 길이는 9m, 너비5m, 높이 6m로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내부 천정과 벽은 모두 화강암이다. 입구에는 돌을 다듬어 네모난 문틀을 만들고 외부공기를 막기 위하여 강돌로 뒷벽을 채웠으며, 외부에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진 후 흙을 쌓아올려 외형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인다.

* 알면 힘이 되는 석빙고 제작 방식 *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석빙고의 천장에는 환기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바깥에서 비가 스며들지 않게 뚜껑으로 덮고 있다. 경주의 석빙고는 3개의 환기구를 가지고 있으나, 이곳 현풍석빙고에는 2개의 환기구가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입구는 북쪽을 향하며,화강석을 직사각형으로 연석(鍊石)하여 4개의 홍예(虹霓)를 틀어올리고,홍예 사이에는 직사각의 판석을 걸쳐 천장과 측벽(側壁)을 만들었다. 입구는 장대석으로 틀을 만들고 자연석으로 나머지 벽을 쌓아올렸으며, 후벽은 잡석만으로 두꺼운 벽을 만들었다. 외형은 적석과 점토로 마치 고분처럼 둥글게 뒤덮었으며, 구조형식은 청도 ·창녕 ·경주 ·안동 등에 있는 석빙고와 같은 형식이다.


⊙ 달성(현풍)사직단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사직제는 「삼국사기, 고려사, 신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에서 고증된 것으로 민족과 종파를 초월한 총화 국난극복의 의지를 표현한다. 자연신에 대한 국가적 제의의 유일한 원본으로 조상의 민족고유 전통 제례의식을 전승 보전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신문화유산이다. 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위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은 민선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95년 7월부터 96년 9월말까지 사직단 2기, 홍삼문, 담장 등을 복원하였다.


⊙ 원호루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 92

이 누각은 구한말 1897년 현풍현감 홍 필주가 관직에 있을 때 인근 현령 미향유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풍류와 여흥을 즐기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원래 지금의 현풍면사무소(부리 352) 뒤의 동산에 있었으나 1989년에 면사무소 증축으로 해체되었다가 초대민선 달성군수 양시영에 의해서 현 위치에 이축 복원되었다.(1996∼1998)


⊙ 달성문화원


- 홈페이지
달성문화원 http://dalseong.kccf.or.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 92

달성문화원은 1985년 11월 향토문화예술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익법인 단체이다. 대구, 달성은 같은 뿌리로 1914년 지역개편에 따라 중심부를 대구로 하고 외곽지와 현풍군을 합병하여 16개면으로 발족되었으며, 대구시세 확장에 따라 7개 읍, 면이 대구에 편입되어 오다가 1995년 3월 경상북도에서 대구광역시로 달성군 9개 읍, 면이 편입되어 81년 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달성군에 위치하고 있는 비슬산에는 불교문화, 낙동강에는 유교문화가 발달하였다.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옥포 용연사의 석가 진사리를 모신 석조계단(보물)과 유가종의 고향땅인 유가사(유가란 인도 범어인 YOGA에서 비롯된 결합, 조화, 균형의 뜻)와 참선으로 유명한 도성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훈련장으로 사용한 남지장사와 속암 청련암(유형문화재) 등이 있다.
유교문화로는 조선조 5현의 수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보물),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위폐를 봉안한 예연서원(기념물)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다. 이러한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향토 문화를 발굴 계승하는 것이 달성문화원의 주된 사업의 목표이다.

* 달성문화원의 주요 사업에 대하여 *
달성문화원은 지역 문화의 발굴과 계승을 위하여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및 지역 축제들의 사업을 개발 추진 중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달성충효문화학교와 청소년문화학교, 문화원 가족 수련대회, 비슬산 참꽃제 산신제 등의 문화 프로그램이 있다. 또한 축제로는 정월대보름 달맞이 기원제 및 축하공연과 미술실기대회, 서예실기대회, 사직제, 달성충효예술제(미술외 6종 전시), 군민의 날 기념 축하공연 등이 있다.


⊙ 현풍향교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20길 27-8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임진왜란 후 현감 이영도(李詠道)가 구(舊)교동에 중건하였다가 1759년(영조 35) 현감 김광태(金光泰)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1년에 현감 허고(許估) 등이 중수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달성군의 관할이 되었다. 1931년 군수 신현구(申鉉求) 재직 시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 등을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향교의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3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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