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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성역사캠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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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역사캠핑장


- 홈페이지
https://www.haemicamping.com/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40

해미읍성역사캠핑장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자리 잡고 있다. 캠핑장은 서산시청을 기점으로 13km가량 떨어져 있다. 자동차를 타고 중앙로, 남문 2로, 동문 1길을 차례로 달리면 닿는다.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 안팎이다. 캠핑장에는 마사토로 이루어진 오토캠핑 사이트 15면이 마련되어 있다. 카라반과 트레일러 출입이 가능하다. 캠핑장 중앙에는 여름철 무더위를 날리기 좋은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다. 캠핑장 주변에는 해미읍성이 있어 연계 관광에 나서기 수월하다.


※ 소개 정보
- 개장기간
봄, 여름, 가을, 겨울

- 문의및안내
041-688-0999

- 쉬는날
연중무휴

- 신용카드가능정보
없음

- 애완동물동반가능정보
불가

- 예약안내
https://www.haemicamping.com/%ED%95%B4%EB%AF%B8%EC%9D%8D%EC%84%B1%EC%97%AD%EC%82%AC%EC%BA%A0%ED%95%91%EC%9E%A5-%EC%98%88%EC%95%BD

- 유모차대여정보
없음

- 이용시간
14:00~익일12:00

- 주차시설
가능





◎ 이용요금
25,000원~50,000원
※ 이용요금은 변동될 수 있으므로 홈페이지 참조 또는 전화 문의 요망



◎ 부대시설
전기, 온수, 물놀이장, 놀이터



◎ 주요시설
안전시설 설비사항 소화기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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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 관광 정보

⊙ 서산 해미읍성


- 홈페이지
서산시 문화관광 https://www.seosan.go.kr/tour/contents.do?key=5972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하다.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완성한 석성이다. 둘레는 약 1.8km, 높이 5m, 총면적 196,381m²(6만여 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 남, 서의 세 문루가 있다. 최근 복원 및 정화사업을 벌여 옛 모습을 되찾아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와 고문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 때에는 1천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서 있다. 바로 성문 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 호야나무(회화나무)
감옥 입구에 서 있는 300년 된 나무로, 이 나무의 가지에 신자들이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 고문하였었고, 그 흔적으로 철사 줄이 박혀있다.

⊙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


- 홈페이지
http://www.seosan.go.kr/tour/index.do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36-1 (해미면)

해미읍성 안에 있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졌으나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 서산시 청소년문화의집


- 홈페이지
서산시 청소년문화의집 http://s2youth.co.kr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3길 33

서산시 청소년 문화의 집은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청소년 전용 문화공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청소년 활동과 국내외 문화교류를 통하여 창의적이고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을 지닌 청소년을 육성하는 청소년 문화의 장이다.


⊙ 해미향교


- 홈페이지
http://www.seosan.go.kr/tour/index.do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해미향교길 2-13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숙종 때와 1844년(헌종 10)·1967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성전·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전적으로는 판본 16종 81책, 사본 3종 7책이 있다.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 해미순교성지(여숫골)


- 홈페이지
http://www.haemi.or.kr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해미면)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자들을 묶어 물속 둠벙에 빠뜨려 생매장을 시켰던 진둠벙과 해미천 옆에 생매장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 유해발굴지에 조성된 노천성당, 서문 밖 순교지에 있던 자리개돌 원석이 보존되어 있다. 해미순교성지 인근에는 내포 지방에서 해미로 넘어가는 순교자 압송로였던 한티 고개가 있다. 고갯길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정상에 1처가 시작되어 해미 방면으로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 일락사(서산)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일락골길 501

일락사(日樂寺)는 일락산의 서남편에 위치한 고찰이다. 일락사에 대해 기록된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사찰에 전하는 사기와 1970년대 이후에 발간된 각종 서산군지와 해미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663년(신라 문무와 3)에 의현선사가 창건하였고 여러 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락사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문화재자료)과 '일락사 철불'(문화재자료)이 있다. 일락사의 밑으로는 황락계곡이 있다.


⊙ 송덕암(서산)


- 홈페이지
http://www.seosan.go.kr/tour/index.do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큰골로 11-84

송덕암은 서산시 해미면 상왕산에 자리한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이다. 송덕암은 상왕산의 서남쪽 산기슭에 있는 위치한 태고종파의 조그만 암자이다. 해미읍에서 수덕사를 찾아 덕산으로 향하는 국도는 오른쪽에는 산수천이라는 저수지가 있으며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주변의 풍광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매우 조용히 산길이었고, 송덕암은 바로 그곳에 숨어 있는 아담한 절집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요 근래 풍광은 한적한 시골마을과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10여년부터 한서대학교가 위치하면서 작고 조용했던 시골 산동네가 대학촌으로 변하면서 화려하고 요란한 도시적 풍경으로 바뀐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송덕암은 더욱 작게만 느껴지는 그런 절이다.

송덕암은 길 가에서 쉽게 찾아들어가지만, 들어가 보면 사찰의 전체 모습을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석비와 석등, 7층석탑 등의 석물이 참 많구나 싶을 정도로 여러 개가 놓여 있다.사찰의 중앙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5층석탑이 놓여 있고 그 앞에 복을 비는 공양주들의 촛불이 켜져 있다. 법당인 약사전은 사찰의 중심에서 왼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 맞은편과 뒤로는 여러 채의 요사채가 있으며,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상왕산 송덕암은 찻길에 붙어 있어서 절집을 찾기는 쉬우나 절집 주변이 번잡해져 자동차소리와 학생소리 등에 염불소리가 묻혀 버리는 그런 곳이다. 사찰에 들어가면 여느 사찰처럼 법당 앞마당이나 탑 주이가 탁 트이는 데 비해, 이곳 암자는 여백 없이 여러 성보유물을 연속해서 배치하고 열거하는 등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느낌이 들게 하는 독특한 암자이다.


⊙ 김공 휘 유경 효자문·김공 휘 홍익 충신문


- 홈페이지
https://www.seosan.go.kr/tour/index.do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 김공 휘 유경 효자문

이 효자문은 김공 휘 유경(단기 4002~4081년/서기 1669~1748년)께서 10세때 친상을 당하여 예법대로 복을 입지 못한 것을 애통하신 나머지 공의 춘추 17세(단기 4073년/서기1740년)에 추복을 하고 조석으로 곡하며 여묘3년간 슬픔을 다하신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문이다. 영조께서 들으시고 가상한 마음이라 하며 식물까지 내리시고는 경은 사양치 말라 하셨다. 그리고 공께서는 평생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시며 충언으로 일관하시니 이로 인하여 일신상의 영달보다는 언제나 환해의 풍파가 거세였다. 공은 충신문 김묵재공의 종증손이며 자는 덕유요 호는 용곡이시다. 현종 10년 기유 2월 4일생으로 영조24년 (단기 4081년/서기 1748년) 무진 7월 8일에 졸하시니 향수 80이셨고, 용곡집이 가장으로 전한다. 후에 효정이라 증시하고 영조 27년 (단기 4084년/서기 1751년) 신미에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다.

* 김공 휘 홍익 충신문

이 충신문은 김공 휘 홍익(단기 3914~3969년/서기 1581~1636년)께서 병자호란때 연산 현감으로 재직중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 험전땅에서 중과부적의 적병과 일척단검으로 항전하시다가 단기 3969년(서기1636년) 12월 27일에 춘추 56세로 장렬히 순국하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문이다. 또한 충곡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어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리고 묵재공 실기 1권이 전한다. 공의 본관은 경주요, 자는 익지며 호는 묵재니 선조 14년 신사 2월 12일생이시다. 영조 17년(단기 4074년/서기 1741년) 신유에 나라에서 정려의명이 내려지고 정조 18년(단기 4102년/서기 1769년) 갑인에는 충민이라 증시되어 현판을 개건하다.


⊙ 정순왕후생가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 (음암면)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칸, 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3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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