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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상북도 구미시] 구미시청소년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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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청소년수련원


- 구미시청소년수련원
054-474-0912

-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4길 12

구미시 청소년 수련원은 대구 근교의 청소년 수련시설 장소이다. 학교는 물론, 청소년 단체, 가족, 일반 단체도 이용 가능하며 레포츠 체험(서바이벌 페인트 볼, atv 사륜바이크) 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여름에는 최대 1,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야외 물놀이 시설이 개장되어 일반 가족, 각종 단체에서 이용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 소개 정보
- 문의및안내
054-474-0912

- 쉬는날
연중무휴

- 신용카드가능정보
가능

- 애완동물동반가능정보
가능

- 예약안내
유선 예약 가능

- 유모차대여정보
없음

- 주차시설
주차 가능

- 주차요금
무료





◎ 체험프로그램
서바이벌, 레크레이션, 야외수영장, 청소년활동프로그램



◎ 주요시설
숙소, 운동장, 대강당, 세미나실, 캠핑장



◎ 부대시설
식당, 족구장, 서바이벌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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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 관광 정보

⊙ 보천사(구미)


- 홈페이지
http://www.bocheonsa.com

-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4길 86

보천사(寶泉寺)는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매봉산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香初老佛微微笑 차의 첫 향기에 노불은 잔잔히 미소 짓고 鍾後靑山聽 종소리 울린 후 청산은 묵묵히 귀 기울이네. 해평면 매봉산 보천사에서는 차 향기가 난다. 구미시에서 10여 분 남짓의 거리에 있는 보천사에 이르면 가장 먼저 보천다회의 다실 겸 강의실로 사용되고 있는 설법전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늘 맑은 차 향기가 새어나온다. 설법전의 한 벽은 옹기종기 다기들로 가득하다. 정갈하게 우린 차 한잔을 손님에게 내어주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불교에서는 아침마다 도량의 가장 맑은 물로 우린 감로의 차를 삼보께 올리고, 차 마시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으로 인식해 왔다. 보천사에서도 현 주지스님의 상좌인 지민스님과 구미시의 공무원 불자가족들을 중심으로 보천다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보천사는 매봉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남으로 툭 트인 전망은 낙동강을 시원스럽게 담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25대 충렬왕자 왕소군이 신병이 있어 이곳에 와 수양하면서 이름난 샘의 물을 먹고 병이 완쾌하였다고 하는데 그 샘이 바로 보천(寶泉)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보천사(寶泉寺)라 하고 바로 앞쪽 낙동강의 나루터도 보천탄(寶泉灘)이라 하였으며 이 골짜기의 명칭도 보천골로 전해 오고 있다.

이렇게 여러 이름을 만들고 왕자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전설 속의 ‘보배로운 샘’은 지금은 찾을 길 없고, 한때는 영남사림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고 선산부사를 지내기도 한 점필재(焰畢齎) 김종직(金宗直)이 선산의 열 가지 빼어난 것(善山十絶)의 하나로 꼽으며 “바다의 장사치들이 봄 가을로 이곳에 배를 대고 물건을 팔고 돌아간다.”고 했던 보천탄도 맨발로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로 변해 버렸다. 또한 광해군 10년(1618)에 나온『일선지(一善誌)』에 “보천탄가에 예전에 보천사가 있었으니……”라고 했으니 옛 절 보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어 그 이름만 전하여 오다가, 옛 절터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되면서 다시 법등을 잇게 되었다. 정확한 창건 시기와 이후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없으나 발굴된 석조여래좌상이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한 것이므로 창건 시기를 이 무렵으로 추정할 뿐이다. 지금도 보천사 주변의 논밭을 파헤치면 옛 기와장의 파편들과 주줏돌들이 발굴된다고 한다. 오랜 세월 견뎌온 석불만이 말없이 맑은 차 향기에 잔잔히 미소 지을 뿐이다.


⊙ 매학정일원


- 홈페이지
https://www.gumi.go.kr/tour/main.do

-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강정4길 63-6

매학정은 고산 황기로와 그의 사위옥산 이우가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고산은 서예가 뛰어나서 초성이라 하였고 옥산 역시 서예의 대가였다. 1533년에 조부의 휴양지에 정자를 지어 매학정이라 하였으며, 후에 옥산이 물려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54년 옥산의 증손 학정 이동명이 중건하고 1675년 그 옆에 귀락당을 지었다. 이 정자는 남향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3층의 기단 위에 막돌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마 끝 서까래가 1단으로 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1843년 정자 뒤에 세운 매강서원은 1868년 훼철되어 주춧돌만 남아있다.

⊙ 구미 낙성리 느티나무


- 경상북도 삼림자원과
054-880-3597

- 주소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 230-1

구미시 해평면은 내륙의 지명 중 해(海)자를 쓰는 몇 안 되는 지역으로 드넓은 문량, 해평들을 가지고 있다. 국도25호선을 따라 낙성리로 가자면 먼저 유형문화재인 쌍암 고가, 북애 고가가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는 해평리를 지나 매봉산 아래로 올라가야 한다. 낙성1리 마을은 매봉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로 5개 자연부락으로 해평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변에 연접한 시장에는 주로 상인들이 영업하며 그 외 지역은 전혀억인 농촌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낙성리의 자연부락인 앞 고을 지명의 유래는 해평현의 동헌이 있는 앞 마을이라는데서 앞고을이라 하였으며, 서원마을이란 해평현 때 향교가 있는 곳으로 낙봉서원이 지금도 낙성리에 남아 있다.

아곡은 옛날 신라시대 파징현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향교 및 사창이 있었다고 하여 옆에 있는 못을 아곡지라고 한다.창마라는 마을은 해평현의 병기창이 있던 곳이었으며, 중리 마을은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금스골(金石) 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의 비 해량원 부인의 출생지이다. 창마에는 나무 둘레가 5.5m, 수령이 21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 앞을 떡 버티고 있으며, 앞에 있는 당산과 뒤에 있는 주산에 매년 정월 미명에 동제를 행사했는데 제수는 오곡으로 찰밥과 어포류이다.지금은 나무 아래 쉼터를 조성하여 마을의 일들을 논의하고, 또 마을의 논공행상을 논의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관련 고사

60~70년대 땔감이 아주 귀하던 시절에 마을 사람이 이 나무에서 말라 떨어진 가지를 주워 땔감으로 사용하였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부스럼이 났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떨어진 나뭇가지도 절대로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또한 이동네에 사는 사람이 나무를 베어 사용하려고 톱을 갖다 대는 순간, 밑으로 드리워졌던 가지가 위로 치솟아 오르고 천둥 번개가 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고 하며, 그 때 치켜올라간 가지가 지금까지도 늘어지지 않고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두려워 그 나무에 매년 정월이면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 낙봉서원


- 홈페이지
http://www.gumi.go.kr/tour
http://www.cha.go.kr

-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성1길 84-7

이 서원은 1646년(인조 24)에 건립되어 김숙자(金叔滋), 김취성(金就成), 박운(朴雲), 김취문(金就文), 고응척(高應陟) 등 5인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이다. 1787년(정조 11)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그 후 1933년에 강당을, 1943년에 외삼문을, 1977년에 사당을, 1989년에 동재를, 1990년 서재를 다시 지어 복원하였다.


⊙ 금오서원


- 홈페이지
https://www.gumi.go.kr/tour/main.do

-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유학길 593-31

이 서원은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에 지었다. 금오산(金烏山)에 처음 지었으며 1570년(선조 8)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02년(선조 35) 부사 김용(金涌)에 주도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장현광이 「금오서원중건봉안문(金烏書院重建奉安文)」을 지었다.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고 중수하였다. 이때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을 추향하고 이후 장현광(張顯光)을 추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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